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문단 편집) === 처가집 === ||[[파일:kfpkhnm.png|width=100%]]|| || 붉은 원 안의 여자가 콘스탄체[* 1762-1842. 장수한 탓에 사진의 발명이 이뤄질 때까지 살아남았다. 모차르트는 [[초상화]]의 시대에서 살았지만 위의 사진은 1840년에 촬영된 것. 다만 현재 원 안의 인물이 콘스탄체가 맞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과정에 대해서는 전술한 모차르트의 생애 부분을 참고하자. 최고의 음악가답게 가만히만 있어도 숱한 여자들이 꼬이기 쉬운 위치인데도 [[강간]]과 [[불륜]]을 흔히 묵인하던 시대에 신기할 정도로 바람 피우거나 [[애인]]이나 [[첩]] 단 한 명도 들이지 않고 콘스탄체 한 사람에게 충실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자금 관리 능력과 지나친 돈낭비와 도박, 사치로 인해 경제를 말아먹고 오페라 가수로 잘나갈 수 있었던 아내와 두 아들의 삶을 괴롭게 만들었다. 콘스탄체는 그간 영화 [[아마데우스(영화)|아마데우스]]를 비롯 각종 매체에 나온 철부지 이미지, 뮤지컬 [[모차르트!]]에서도 콘스탄체는 무식한 천출로 나온 것, 모차르트의 부친이자 콘스탄체의 시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몹시 마음에 안 들어했던 전력 때문에 남편을 말아먹은 악처 또는 남편의 음악을 이해 못하고 사치만 즐겼던 여자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이는 실제 콘스탄체가 들으면 매우 억울해할 정도로 많이 왜곡된 평가이다.''' 또 그녀가 남자를 많이 만나고 다닌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라는 평도 있었으나, 이는 모차르트 부부가 자주 사람들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사교 생활을 즐겼기 때문에 나온 소문일 뿐이며 실제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모차르트의 제자 쥐스마이어와 모차르트의 막내아들의 이름이 프란츠 사버로 똑같다는 이유로, 이 막내아들이 사실은 쥐스마이어의 아들이라는 정신나간 주장도 있었다.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는 유전자 감식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닮았다.] 기본적으로 베버 집안의 4자매 요제파, 알로이지아, 콘스탄체, 조피는 모두 음악가가 되기 위한 교육과 글을 쓰는 교육을 받은 교양을 갖춘 여성들이었으며, 음악에 대한 이해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만약 진짜로 콘스탄체가 별볼일 없는 천박한 사람이었다면, 모차르트와의 관계도 일회성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라는 위치도 있는 데다 당시엔 [[이혼]]을 향한 사회적 시선도 나빴기 때문에 이혼남으로 찍히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삶을 위해서라도, 평생의 이해자, 동반자가 될 신부를 고르는 일에도 평소보다 더욱 까다롭게 신경 썼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체의 친정 베버 집안의 4자매는 다들 성악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친딸]]급의 자매들. 장녀 요제파와 차녀 알로이지아는 훌륭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당대를 휘어잡은 명가수가 되었으며[* 두 사람을 위해 모차르트가 작곡한 아리아나 오페라의 배역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가수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장녀 요제파는 [[마술피리]] 초연에서 '밤의 여왕' 배역을 맡아 그 유명한 아리아 'Der Hölle Rache'를 부르기도 했다.] 3녀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언니들처럼 전업가수가 될 수 있는 성악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내 조피도 성악에 재능이 있어 성악가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후 요제파와 알로이지아를 위해 다수의 [[아리아]]를 작곡했으며(K 383, K 416, K 418, K 419, K 538) 종종 오페라의 배역도 맡겼다.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의 콘스탄체 역은 알로이지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었다.[* 다만 알로이지아가 초연 때 실제로 이 배역을 맡았는지는 불확실하다.] 또 돈 지오반니의 빈 초연 때에도 알로이지아가 돈나 안나를 담당했다. 요제파는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역으로 열창하여 절찬을 받았다. 셋째 딸 콘스탄체도 모차르트와의 결혼으로 전문 가수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모차르트의 [[https://www.youtube.com/watch?v=97Twh_q8lQs&t=240s|《대미사 c단조, K. 427》]]를 보면 그녀가 전문 성악기 못지 않은 역량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 그녀가 직접 소프라노 독창을 불렀다. 모차르트가 소프라노를 위한 음악을 작곡할 때 그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을 정도로 성악에 대한 재능과 이해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전술했다시피 콘스탄체는 부유한 집안 출신에다 사교생활로 인해 모차르트 생전에는 남편 못지않은 낭비벽을 자랑했다. 벽난로를 지필 땔감이 없어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춤을 췄다는 에피소드 등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접한 사람들이 모차르트가 가난하게 살았다는 인상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가난하게 산 게 아니라 반대로 너무 사치스럽게 살았던게 문제였다.[* 애초에 당시에 벽난로를 갖춘 집 자체가 상당히 비쌌다. 땔감이 없었던 건 일시적으로 돈이 부족했던 상황이었을 뿐이지, 계속 그렇게 살았던 게 절대 아니다. 또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춤을 출 생각을 한다는 것도 진짜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생각해 내기 힘든 아이디어이다.] 콘스탄체에 대한 후대의 비난들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데, 콘스탄체가 당시의 일반적인 아내들처럼 집안일과 내조에 충실하지 않고 사교 모임에나 나가고[* 모차르트 부부는 집안일을 해줄 사람을 고용했기 때문에 이런 귀족스러운 생활이 가능했다. 심지어 이 부부는 [[요리사]]까지 고용했다.] 남편 돈을 펑펑 써댔기 때문에, 결국 집안이 빚에 허덕이고 남편이 일중독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부부가 겪었던 자금난의 근본 원인은 사치와 당구도박에 빠져 있던 모차르트 본인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계속 닦달하여 과로사로 죽게 했다던가 돈을 보고 모차르트와 결혼했다는 식의 관점은 본말이 전도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1791년 12월, 어린 두 아들과 빚만 잔뜩 남은 상황에서 남편이 급사해 버리자 콘스탄체는 절망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간 철모르는 안방마님이었던 콘스탄체는 극강의 생활력을 발휘했다. 우선 콘스탄체는 이미 주문받은 [[레퀴엠]]을 완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여러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작품을 완성시켰다. 이어 남편의 미출판 작품을 차례로 출판하였다. 또한 남편의 작품들로 공연을 기획하여 수익을 얻기도 했다. 또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연금을 받는데도 성공했다. 이처럼 콘스탄체는 돈과 관련된 일을 잘 챙겨서 빚도 모두 갚고 생활도 금세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어느정도 여유 있는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콘스탄체는 [[덴마크]]의 귀족이자 빈 주재 [[외교관]]이었던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 1761-1826)와 가까워졌고 나중에 결국 재혼했다. 폰 니센과 콘스탄체가 가까워진 과정에 대해서는 약간은 서로 다른 내용의 두 가지 설이 있다. 한 가지 설은 평소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던 니센이 먼저 모차르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그의 미망인 콘스탄체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모차르트의 유고들을 출판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도와줄 명목으로 콘스탄체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폰 니센이 콘스탄체가 세를 내놓은 집에 거주하게 되어 세입자와 세입주로 알게 되었다가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여든간에 보통 재혼생활에서 아내가 전남편에게만 몰두하면 결혼생활이 말도 아니게 망가지겠지만 이 경우는 니센 본인도 열렬한 모자르트팬이자 덕후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는듯 하다(...). 어쨌든 콘스탄체와 니센은 서서히 가까워졌고 자연히 니센은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악보 및 유품을 정리, 보존하고 악보를 출판하는 일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 1798년경부터 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로 지냈다. 다만 공식적인 재혼은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모두 장성해서 출가한 후, 콘스탄체[* 재혼 후에도 콘스탄체는 콘스탄체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의 나이가 47세가 되던 1809년에야 했다. 이듬해인 1810년에 니센은 오랜 빈 주재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본국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10년간 유럽 각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생활했다. 콘스탄체 역시 1810~1820년 10년간 새 남편과 함께 코펜하겐 및 유럽 여러 곳에서 생활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Georg_Nicolaus_Nissens_gravsten.jpg|width=200]] || || 니센의 묘비.[* 묘비에 Gatte der Witwe Mozart(모차르트 부인의 남편)라고 씌어있는데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모차르트에 열중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 니센이 정년퇴직을 한 후, 니센과 콘스탄체 부부는 그동안 모았던 유품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기로 했고, 제대로 모차르트 연구를 하기 위해 1824년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 정착했다. 모차르트의 친누나인 마리안네와도 조우하였고, 마리안네가 가지고 있던 모차르트의 자료도 넘겨받게 되었다. 충분한 자료를 확보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는데 착수했다. 하지만 니센은 전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서문만 조금 작성한 채 1826년 사망했다. 이후 이 전기작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사람이 매달린 끝에 1828년에 겨우 완성되었다. 한편 1826년 니센이 사망한 후 콘스탄체는 언니 알로이지아와 동생 조피에게 잘츠부르크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당시 큰 언니 요제파 베버는 1819년에 사망했고 알로이지아 베버는 1795년 남편 요셉 랑어와 사실상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정식 이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1795년 별거한 후 다시는 남편과 만나지 않았다. 한편 요셉 랑어는 1800년경부터 다른 여자와 동거하면서 세 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1831년 사망했다.] 막내 조피는 남편이었던 크로아티아 출신 가수겸 작곡가 야콥 하이벨(Jakob Haibel)이 하필 니센과 같은 해인 1826년에 사망한 탓에 미망인이 된 상황이었다. 이런 정황 덕분에 알로이지아와 조피는 콘스탄체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세 자매는 함께 찰츠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알로이지아는 1839년, 콘스탄체는 1842년, 조피는 1848년에 차례로 사망했는데, 조피가 사망했을 때 상속자가 없는 관계로 세 자매의 재산은 잘츠부르크시에 증여되었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두 아들은 조피가 사망하기 전에 사망했다.] 볼프강이 35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과는 대조되게 콘스탄체는 '''80살'''이라는, 당대 기준으로 장수한 편에 속한 인생을 살며 천수를 모두 누렸다.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야말로 [[손발이 오그라든다|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이 넘쳐난다. "언제나 '''당신의 소유물'''인 모차르트", "설탕처럼 달콤한 키스 3개가 당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지금 난 당신을 생각하면서 [[발기]]했어요"라는 등의 내용을 편지에 쓰고 이웃들에게 농담 삼아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런데 콘스탄체도 천생연분답게 비슷한 답장을 보냈다. 이런 편지내용은 그 시대에 유행한 농담이었을 뿐, 두 사람이 변태 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말자. 이런 [[섹드립]]들을 나중에 니센은 모차르트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정도가 심한 내용들은 살짝 편집하거나 점잖은 표현으로 바꾸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지워버리기도 했다.[* 이런 니센의 지워버린 구절들은 후대에 기술의 발전으로 다행히 복원이 되었다.] 이런 민망한 편지나 자료들도 일절 버리지 않고 보존에 힘썼던 콘스탄체와 니센의 노력이 없었다면, 모차르트에 대해 지금보다 아는 게 훨씬 적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